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

1 나 심관(心觀)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500년 뿌리를 둔 몰락한 양반 집안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경북 예천군 하리면 송월리에서 태어난 산골촌놈이다. 아버지는 면서기를 하면서 머슴을 두고 농사도 지었다. 어릴 적 고향집은 첩첩산중 초가지붕에 박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숙제를 하다가 호롱불에 앞머리를 태운 기억도 난다. 물고기 잡고, 썰매 타고, 멱 감고 신나게 놀았다. 소를 몰고 가 풀을 뜯기거나 소죽 끓이는 게 내 담당이었다. 소등에 타고 소 뜯기러 가서는 돌을 데워 감자를 구워먹었다. 객지로 유학을 가서도 방학이면 고향집에서 지냈다. 중3 때 고향집에 전기가 들어왔다. 공부 핑계로 농사일은 많이 거들지 못했지만, 고향은 객지생활을 하면서 생각만 해도 활력을 주는 내 삶의 자양분이다. 나를 키워준 것의 8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향의 산천’이라고 말하겠다. 그래서 지금도 동창회, 재경군민회, 정심회, 학가산회, 예천포럼 등 고향모임에 나가는 것이 행복하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나를 키워준 계곡과 언덕, 시냇가를 거닐고 싶다.”(넬슨 만델라) 나는 집에서 2km 떨어진 면 소재지의 은풍초등을 다니다가 6학년 때 혼자 읍내의 예천동부초등으로 전학 가서 지역 명문 예천중학교로 진학했다. 2학년 때 다시 서울 연희중으로 단신유학을 와서 은평구에 있는 대성고로 진학했다. 파주 김진원이 연희중 동창이고, 윤성철이 대성고 1년 후배다. 학창시절 나는 국어를 유별나게 좋아했다. 수학과 과학은 반대다. 고등 3학년 때 한번은 국어시험이 하도 어려워 학생들 평균점수가 너무 낮았다. 학교에서 일률적으로 10점씩을 올려주었다. 내 자랑인데 나는 106점이 되었다. 중고 때 주로 반공글짓기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고교 2학년 때는 단편소설 ‘귀의기(歸依記)’로 교내문학상을 받았다. 원고는 현재 찾을 길이 없다. 아마도 ‘등신불’과 ‘무녀도’의 하이브리드였으리라. 전형적인 문학소년이었다.

2 79학번부터 법대가 사회계열에서 분리되었는데 사회대를 지원했다. 어릴 때부터의 꿈인 법관의 길을 포기하고 정치학과를 가서 행정고시를 볼 요량이었다. 법대보다 커트라인이 높았고 낙방했다. 하늘이 노랬으나 법관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재수를 했다. 천신만고 끝에 법대를 들어와 담양 김성관을 따라 무슨 사회연구회에 들어갔다. 소백산맥 자락의 농촌 태생인지라 출신성분 면에서 그 길로 계속 나아갔으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내 문학서클로 옮겨갔다. 서울공대와 이화여대 연합 서클인 ‘호라이즌 문학회’다. 서울공대 친구를 따라 갔다. 망원동 회관을 드나들며 2학년 1학기까지 열심히 활동했다. 시도 여러 편 써서 발표했다. 매주 소설책을 읽고 토론하고 문집도 발간했다. 당시 주보와 문집은 필경을 해서 등사기로 찍었다. 내가 롤러에 잉크를 묻혀 등사하고 종이를 빼내는 속도는 엄청났다. 그 실력을 운동권에서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이화여대 쪽에서는 호라이즌 문학회와 이화문학회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대 국문과 82학번 아내와 만나니 이화문학회 출신이었다. 현대시 전공인 아내에게 내 시를 보여주니, ‘이건 시가 아니야’라고 진실을 들은 후로 나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았다. 언젠가 반추(反芻)의 시간을 가지면서 다시 시를 쓰려고 한다. 법대 2학년 2학기부터 만 2년 동안은 꼼짝 없이 사시 준비를 했다. 당시 공부 친구가 해남 임수식, 진도 오승원이다. 일요일 빼고는 2년 동안 점심 저녁을 함께 먹고 중앙도서관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을 공부했다. 사법시험도 앞뒤로 나란히 앉아서 보았다. 그 2년 동안 셋은 술 한 번 함께 먹은 적이 없다. 그 전에 서클 다니며 술을 좋아했던 내가 이 둘을 만나 술 안 먹고 공부만 했으니, 사시 합격에 이 둘의 공로는 거의 8할이다. 여기서 이제야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 때 청주 안용석, 선산 김홍섭, 화순 구길선과 스터디 그룹을 하며 2차 모의고사를 준비했다. 다행히 4학년 때 제25회 사시에서 합격했다. 광주 김광태가 수석, 전주 박성엽이 차석이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한다면 그 뒤가 나였는데, 고백하건대 내심 내가 수석을 차지할 것으로 믿었었다. 허나 변두리 대성고 재수생이 명문 전주고 현역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3 1984년 1월 겨울방학 때 사법연수원에 들어갔고 1985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부산법원에서 시보를 하였다. 그 때는 총각이라 시간이 참 많았다. 그 때 김광태와 함께 2차 시험 문제집 『민사소송법』(고시계)을 썼다. 문제마다 이시윤 박사가 강평을 달아 그 후 10여년 동안 매년 2천여권씩 팔렸다. 책을 쓸 때 서울 원유석과 해남 임수식이 많이 도와주었다. 인세로 상당한 용돈을 벌었다. 나중에 그 책을 보고 공부했다고 인사하는 후배들이 많아 보람으로 여긴다. 연수원 시절에는 전주 오양호, 청주 안용석, 서울 홍세열, 경산 박병무와 스터디그룹을 했다. 해군법무관 때 대구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박병무가 사회였다. 부산법원 시보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올해 1천만명 관객을 돌파한 영화 ‘변호인’은 1980년대 부산의 노무현 변호사와 부림사건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서 장안의 화제였다. 영화에는 ‘송변’이 처음 개업했을 때 부동산등기 전문이라고 적힌 명함을 뿌리고 다니고 여직원이 없어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엄혹한 1980년대 물고문을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노변’의 명함과 다방커피와 관련된, 나의 개인적 추억이 떠올라 혼자 미소를 지었다. 부산 법원에서 시보 15명이 교실 같이 큰 사무실을 함께 썼다. 부민동 법원청사 중 나중에 부산고등법원, 현재 동아대 로스쿨 건물로 재건축된 낡은 별관 2층이었다. 창밖으로는 마당이 있었다. 꺼벙하게 생긴 40살 정도 되는 남자가 가방을 들고 시보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명함을 죽 돌리고는 소파로 시보들을 불러 보았다. ‘노변’은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는 다방에 전화를 하여 커피를 시켜놓고는 열변을 토하였다. 한참 후배인 시보들에게 인사를 하러 와서 다방커피까지 시켜준, 사람 냄새 나는 유일한 변호사였다. 당시 부산 법원은 시국재판으로 늘 시끄러웠다. 창밖을 내다보면 방청하러 온 가족들과 학생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있는 ‘노변’이 있었다. 영화에서 ‘송변’의 감동적인 변론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은 고문에 의한 진술증거에 의해 모조리 실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법조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거기에는 형사재판에서 전가의 보도로 사용된 ‘실질적 진정성립 추정론’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형식적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실질적 진정성립이 추정된다.”는 것이 실무였고 판례였다. 조서에 ‘읽어보고 서명 무인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니 그 조서는 진술한 대로 기재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 제312조는 ‘원진술자의 진술에 의하여 그 성립의 진정함이 인정된 때’ 증거능력을 인정하라고 되어 있었음에도 당시 법원은 이를 아예 무시하였다. 1987년 헌법이 탄생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고, 1980년대 그 ‘노변’은 세월이 흘러 2003년 ‘노통’이 되었다. 그 다음해 12월 16일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2002도537)로 “원진술자의 진술에 의하여 형식적 진정성립 뿐만 아니라 실질적 진정성립까지 인정된 때에 한하여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시하여 추정론을 폐기하였다. 소수의견도 없다. 형소법 규정대로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렸다. 대법원은 그 동안 쌓인, 폐기할 판결이 너무 많자, 대표적인 15개를 열거한 다음 ‘등 다수’라는 말을 넣었다. ‘노변’의 참여정부 사법개혁에 따라 2008년 시행된 개정 형소법 제312조는 보다 세밀한 내용으로 개정되었다. 그래도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20여년 후에 폐기될 판례에 따라 유죄판결을 받았던 영화 속 피고인들을 생각한다. 다시는 영화 속의 장면과 같은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법조인들이 중심을 잡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각자의 몫을 제대로 감당해야 하리라.

4 1989년 서울민사지법 판사가 된 후 법률논문이나 평석을 제외하고 에세이 비슷한 글을 쓴 것은 1996년 9월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이 되고부터다. ‘법원회보’와 ‘법률신문’에 주로 실었다. 1999년 국민일보에 ‘불체포특권 유감’이란 칼럼을 하나 썼다. 법관으로서 글을 쓰는 것이 조심스러웠으나 나름대로 자기검열을 거치고 법원을 위해 쓴다는 소신이 있었다. 그 때 쓴 글 중 영장실질심사제도와 형사사법 전반에 관한 것은 2000년에 『인신구속과 인권』(법영사)으로 묶어 출간했고, 에세이와 칼럼 류의 글은 2013년에 낸 『정의의 수레바퀴는 잠들지 않는다』(예옥)에 실려 있다. 2000년 7월에 진주지원 부장판사로 발령을 받아 1년 7개월 근무하였는데, 관사에서 혼자 지내면서 선거범죄 주석서 『선거부정방지법』(법영사)을 집필하였다. 2002년 대법원 부장재판연구관이 되었고, 당시 법률신문에서 처음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당시 법률신문 취재부장 김진원의 추천으로 법원 몫의 편집위원이 되었다. 2004년 변호사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왜 잘 나가다가(?) 돌연 변호사로 변신했느냐고 물으면 아직은 말할 수 없다. 다만 글을 좀 더 자유롭게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다만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속해 있는지라 사무실에 누가 될까봐 소속은 빼고 그냥 ‘변호사 황정근’으로 글을 쓴다. 2006년에 법률신문 논설위원이 되고부터 사설을 쓰기 시작하여 지금 9년이 다 되어 간다. 수시로 사설을 써야 하기에 법조계 내외부의 현안과 이슈를 늘 챙겨보아야 한다. 내가 익명으로 쓰는 사설을 통해 제도가 개선되고 법령이 개정되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매일경제신문의 ‘매경춘추’ 난과 대한변협신문의 ‘변호사가 사는 법’ 난에도 칼럼을 썼다. 현재는 법률신문의 ‘서초포럼’ 난에 매달 한 번, 중앙일보의 일요판 자매지인 중앙SUNDAY의 ‘황정근의 시대공감’ 난에 4주에 한 번 기명칼럼을 쓰고 있다. 법률신문에는 주로 법조에 관한 글을 쓰고, 중앙SUNDAY에는 헌정체제 전반과 정치·법치와 인권에 관한 글을 저널리스트처럼 쉽게 쓴다. 5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법조인으로서 입은 혜택을 국가와 사회에 되돌려주는 내 나름의 재능기부 방식이 사회 현안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글쓰기를 ‘법률가의 문화적 사명’이라 여긴다. 이는 대학 1학년 때 법학개론을 가르친 최종고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법률가이기 때문에 법의 지배와 인권보장의 관점에서 사회 현안을 바라본다. 내가 쓴 200여 편의 글은 주로 법률가의 시각에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고민하며 쓴 글이다. 나는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단순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안과 전망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나의 생각과 입장을 외부에 글로써 알린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글쓰기를 위해 항상 사회 현안과 중요 이슈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독서와 사색을 하고, 그 결과를 글로 표현하며, 그 후 내가 쓴 글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선비정신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나에게는 경상도 선비 기질이 뼛속깊이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속에 만약 구슬이 있다면 궤 속에 숨겨두지 말고 좋은 상인에게 팔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너는 글쓰기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꿈꾸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누구에게나 행복한 세상’ 만들기가 꿈이라고 늘 말한다. 리더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깊은 감동을 안겨주는 말과 글의 구사능력이다. 논리적 사고력, 치밀한 분석력, 날카로운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2014. 12. 서울법대 38회 졸업 30주년 기념문집)